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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는 곧 우리 나라의 경계입니다. (하략) - 정조실록 5권, 정조 2년 1월 13일 갑술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상략) 남관은 북관보다 비록 백성은 많고 곡식은 적다고는 하지마는, 땅이 양서와 접해져 있으므로 민생들을 옮기거나 곡식을 옮기거나 하여 본시 서로가 필요해지는 방도가 있지만, 북관에 있어서는 이미 영동 곡식의 운반이 힘든데다가 또한 교제곡 수송을 아끼고 있고, 두만강 이북은 곧 우리 땅이 아니므로, 아! 저 부황이 든 무리들이



조사케 했는데, 이제 이 장계를 살펴보건대, 허양의 말과 같으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사신의 장계 중에, ‘목차(목극등)가 전하기를, 「이제 다시 살펴볼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푯말을 세우는 일도 농사 틈을 기다려서 하고, 백성을 혹시라도 상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였으니, 더욱 서둘러 끝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동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당한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위안을 받으려는 군중심리의 전형이므로 이마저 전혀 없을 법한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조선인에 대한 차별 의식은 당시 일본인 대부분이 갖고 있었다. 피지배 식민지인인 조선인을 일컫는 ‘불령선인’이라는 말은 어린이들도 입에 달고 살 정도였다. 그곳에서 조선인은 ‘불온하고 불량한 존재’였다. 대지진 당일에 퍼진 유언비어의 골자는 형무소를 탈옥한 죄수들의 폭동, 사회주의자들의 불순 행동, 그리고 불령선인들의 폭동과 방화였다. 이 중 불령선인과 관련된 소문은 도쿄 전역에 폭탄을



입이 닳도록 힘을 다해 변론하였던 것이라고 고종에게 보고했다. 또 고종실록은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는 일과 관련해 수백 년간 비워두었던 땅 운운하며 정계비 아래 토문강 이남의 구역이 조선의 경계로 확정되었다며 합리화한다. 하지만 그냥 이건 억지에 불과하다. 이중하는 이미 두만강을 토문강 혹은 도문강으로 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만강의 이름은 예전부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왕래하는 공문서에 혹은 토문강이라고 칭하고 혹은 도문강이라고 칭했습니다. 일찍이 변계를 밝히지 않아서 그 칭하는 바를 크게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경계를 논의하는 것에서 우리나라의 원래





대신 임시 서리 의정부 참정 김규홍이 아뢰기를, "북간도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경계 지대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북쪽 변경의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로서 그 지역에 이주하여 경작하여 지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 이제는 수만 호에 십 여만 명이나 됩니다. (중략) 나라의 경계에 대해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전에 분수령 정계비





수본으로 상문하였을 뿐, 물의 근원을 다투어 논할 즈음에는 이미 목격하지도 않고 단지 ‘예예’하고 답하기만 하였으니, 사명을 맡긴 뜻이 어찌 제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청컨대 박권과 이선부를 모두 파직하소서." (중략)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6월 9일 신유 3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숙종이 허락하지 않아 이 일은 잘 넘어갔으나 이후 국경에 푯말을 박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목극등과 조선관원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백두산에서



계엄군의 학살도 엄연히 존재했다. 그런데 군대 스스로가 밝힌 살해 이유 대부분은 믿기 어려운 것으로 가득 찼다. “선인이 폭탄을 던졌기 때문에”, “교량을 파괴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단도를 휘둘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호송 중 도망가서” 등 대다수가 범죄행위를 했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목격자들은 계엄군이 처음부터 살해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자경단은 위급 상황 발생 시 각 마을의 재향군인과 청년 등을 중심으로 모여 주민과 시설을 보호하고, 재난을 수습하는 민간 자치기구였다. 대지진이 발생하자 도쿄 1593개, 가나가와 현 603개, 사이타마 현 300개





회복된 뒤 늙어서 걷지 못할 때까지 아주 건강하게 살다가 제 수명을 다하고 2010년쯤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이 사육사는 “동물들은 죽으면 부검하고 소각해요. 피스도 화장을 했는데 지금도 가끔 보고 싶어요.” 피스의 모습을 떠올리는 그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번식에 실패한 북극곰 ‘통키’도 그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이 사육사는 1997년 마산동물원에서 3살 때 이주한 통키를 맡아 키우면서 여러 차례 번식을 시도했으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북극곰은 번식이 가장 어려운 동물로 번식하면 뉴스가 될 정도란다. 여름이 계속 더워지자 통키가



남쪽으로 600리를 가면 토문강이 있고 훈춘에서 서쪽으로 20리 가면 토문강이 있다고 함을 보면 청나라가 분명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 가보자. (상략) 목극등은 물이 두 갈래로 갈라진 사이에 앉아서 말하기를, ‘여기는 분수령이라 할 만하니 비석을 세워 경계를 정해야 하겠다. 그런데 토문강의 원류가 중간에 끊어져서 땅속으로 흐르므로 경계가 분명치 않다.’ 하고, 이에 비석을 세우고 쓰기를, ‘대청의 오랄총관 목극등은 명령을 받들고 변경을 조사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자세히





농가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레 동물을 접했다. 어린 시절에는 시골 집집마다 소, 돼지, 닭을 키웠기 때문에 동물들은 그에게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청양농공고에서 축산을 전공하며 농장 경영의 꿈을 키우던 그가 사육사의 길로 접어든 것은 고3 때. 당시 에버랜드의 전신 용인자연농원을 운영하던 중앙개발에 지원하고 시험을 봤는데 덜컥 합격됐다. “지원한 뒤 어머니가 꿈을 꿨는데 병아리를 품에 가득 안고 있었답니다. 아버지가 일찍